그 나물의 그 밥----리포트 1
지난 2월 13일 우리 양정산악회 정기총회 말미에 제기되어 XX위원회를 만들었고 7인 위원을 위촉(?) 위임(?) 선출(?) 선정(?)했습니다. 제기된 1934년 사진이나 이대교수 세미나 논문이 밴드나 홈페이지에 오르기를 일주일을 기다렸습니다.
여러 회원님들의 다양한 의견이 밴드에 올라오는데도, 1934년 사진과 논문은 게시되지 않았습니다.
이화여대 양현혜교수(김교신 선생님을 평생 연구하신 분)저서 2013년에 발간된 김교신의 철학-사랑과 여흥-도서 속에도 1934년도 양정산악회 사진이 없습니다. 이대 양현혜교수님이 방학에다 연구실이 수리중이라 미팅이 불가하여 수소문 끝에 통화를 하였습니다. 양현혜교수는 전에 양정학교에서 세미나 발표를 할 때 김교신 선생님의 선지자적인 교육과 철학과 제자사랑, 선생의 사상을 발표했는데 당시 발표 원고는 찾는데 시간이 걸리신다하여, 사진을 볼 수 있겠냐고 여쭈었더니, 사진은 고대 강성복교수가 갖고나오셨고 체육으로 민족정기와 독립정신을 지도하려고 하신 김교신 선생님에대해 발표하신 것으로 기억이 된다며 고대 강성복 교수님께 알아보라고 정보를 받았습니다. 다시 원점에서 강성복 교수를 찾기 위해 인명사전과 인터넷 검색에서도, 고대 사이트에서도 아직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진에 인물과 날자와 사진의 출처가 중요해서 찾으려고 하는데 못 찾았습니다. 홍용표 전회장이 고대 교수니까 찾아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진은 못 보았지만 유추하여 생각해보면, 1934년도 산악부 사진이라면 그 사진속의 인물-산악부원은 1,2,3,4,5학년 산악부 학생들 중에 몇 명이 사진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진 속 학생들이 1937년 즉 3년 후에 1,2학년생이 4,5학년이 되었고, 3,4,5학년 선배들은 졸업을 했을 것입니다. 5학년이된 최기덕 회장님이 리더가되어 지리산도 최초 등정하여 각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특히 조선일보에 5월1일부터 5월6일까지 5회에 걸쳐 기고하여 연재도하여 양정산악부를 조선팔도에 널리 떨치게 하셨습니다. 1934년에 1학년이었던 이상선군이 1938년 5학년 산악부 리더가 되어 교지에 산악활동보고를 기고한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있습니다.
1934년도에 사진에 있는 학생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정식 산악부원이고 1937년도 3살 더 먹은 등산과 크라이밍으로 단련된 상급생들은 여자를 달고 다니는 하이킹 건달이라고 원조 선배님들을 공개석상에서 평가 절하하며 젊은 회원들을 흥분시키고 현혹시킨 울고 싶은 해픈닝 사건이 된 것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즉 1934년 사진에 있는 산악부원이나 1937년 사진에 있는 산악부원이나 다 같은 산악부원입니다. 그 나물의 그 밥인 것을 갖고 다른 사람으로 저도 착각하여 선조님들에게 큰 죄를 진 것 같습니다.
모든 조직이 다 여명기 혹은 태동기가 있다. 우리 산악회도 어떤 글에는 길게 20년전 에서부터, 혹은 김교신 선생님 부임 때, 혹은 황욱 선생님 부임 때부터 라고도 하는 글도 있다. 아울러 현재우리 양정OB산악회도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여명기가 있었고
1966년에 창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조직이 하루아침에 우뚝 솟아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양정산악회의 원년은 1937년 3월 지리산 천황봉 정상에 펼친 양정산악깃발에 쓰여 있는 1937년과, 4월 달에 학교에 등적 한 것과, 그해에 학교에서 예산을 처음 배정받았다는 것이, 확실한 근거에 입각한, 어느 누구도 이의제기 못하고, 인정하는 원년으로 정하셨던 것이며, 지켜져 왔습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잊고 지내다가 솔직히 늙어서 판단력이 둔해져서 몇 시간동안 방황했었습니다.
정기범 회장님이 기억하는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학교에서 예산을 수령하는데 전에 3번째로 많이 타던 수영부가 4번째로 밀리고 예산도 많이 깎기고, 우리 산악부가 3번째로 많이 예산을 타게 되었답니다. 수영부장과 수영담당선생님하고 산악담당 황욱선생님과 최기덕 리더와 예산 때문에 언쟁을 심하게 하였답니다. 최기덕 리더가 “너희 수영부는 빤쯔만 입고 물속에서 운동하니까 빤쯔만 사면되는데 무슨 예산이 많이 필요하냐?”“우리 산악부는 자일, 피켈, 텐트, 캬라비나, 아이젠 등 공동장비와 개인장비가 전부 돈인데, 원정등반가면 예산이 많이 드는데 학교 예산으론 턱도 없이 모자른다” “너희는 빤쯔만 들고 서울운동장에 가면되지만 우리는 기차, 버스타고 한 살림 메고 가고, 또 올라가서 바위까지 타고 와야 되니까 비교가 안 되니까 수긍하라”고하여 이기셨답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우리 산악부가 학교예산을 3번째로 많이 탔다는 대목입니다.
양정산악 60년사, 70년사 책이 없으신 분, 또 읽어 보실 분을 위하여 우리 양정산악 70년사에 있는 1934년부터 1938년까지의 사진과 여명기 글, 탄생기 글, 산악부 리더들의 글들을 첨부1에 붙였습니다.
조선일보에 1937년 양정고보 한국 최초 지리산 종주 산행기 5회 연재(최기덕 리더 기고) 기사를 첨부2에 붙였습니다.
아울러 홍용표 외 양정산악회 회원들이 분단 후 최초로 백두산 정상 등정기는 첨부3에 붙였습니다.
밑줄 친 곳과 동그라미 친 곳을 참고하여 주십시오.
본 리포트는 홍용표, 정기범, 송익재에게 이메일을 보내어 서로 서류적으로 검토 확인하고,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아래 질문에대한 의견?
양정 산악 60년사와 70년사 서두와 앞에10여장을 읽으시고 첨부 1,2,3를 보시면 1937년이 우리산악회의 원년이라고 확신이 서는데 여러 회원님들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댓글로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대책
1안. 2월13일 총회에서 만든 XX위원회는 시간부족과 사회미숙으로 절차상의 하자로 원천무효이다.
2안. 2월13일 총회에서 만든 XX위원회를 열어 원년을 흔드는 회의를 하는 것은 선배들을 2번 욕보이는 것으로 회의자체를
안하고 다음 총회에서 해체하는 결의를 한다.
박민원 리포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