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 없이 등산도 없다 山 에서 살아남기
하산 없이 등산도 없다
등산과 하산, 또는 등반과 하강은 알피니즘의 알파와 오메가요 기본 틀이다.
등산은 오르는 일을 목적으로 삼지만 필경은 하산이라는 수단으로 그 행위와 과정이 끝난다. 그래서 등산은 반드시 하산을 예상하며 하산은 언제나 등산이 그 전제가 된다. 등산과 하산 사이에는 원래 그 뜻에 경중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등산과 하산의 상호 관계는 한낱 알피니즘의 외형일 뿐 알피니즘이 안고 있는 내부 세계는 이러한 형식 논리로는 알 수가 없다.
등산과 하산에는 저마다 독자적인 세계가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하산이 등산보다 한층 더 심오한 정황을 연출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등산이 주개념인 데 대해 하산이 종개념이라는 숙명에서 온다.
등산은 알피니스트의 수만큼 있다’고 기도 레이(Guido Rey․1861~1935)가 말했다. 등산의 형식과 내용이 산에 오르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이야기다. 또 등산은 시대에 따라 그 생각과 어려움이 달라진다. 초등과 재등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초창기 개척자들이 지녔던 등산관이나 그들이 부딪쳤던 곤란과 위험은 현대의 첨예 등산가들과 큰 차이가 있다.
1787년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Mont Blanc․4807m)을 두번째로 오른 스위스의 과학자 드 소쉬르는 이런 글을 남겼다.
“인간의 영혼이 고양되고 넓고 장대한 지평이 눈앞에 벌어졌다. 고요와 장엄함이 주위를 감싸는 가운데 대자연의 소리가 바로 들려오는 듯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오늘날 몽블랑은 산을 조금 안다는 사람이라면 안내인을 앞세우고 어려움 없이 오르내리거나, 케이블카로 에귀 드 미디(3848m)에 올라 눈앞에 몽블랑을 바라본다. 그 옛날 공포와 미지의 세계였던 곳이 이제 일상 생활 속에 들어오다시피 했으니 드 소쉬르의 감동은 다시 느끼기 어렵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몽블랑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구의 어느 고산에서도 그렇게 고양된 감동을 토로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인간으로 8000미터 고소에 제일 먼저 오른 것은 1950년 프랑스의 모리스 에르족과 루이 라슈날의 안나푸르나(8091m)등정이다. 그때의 감회는 어떠했는가.
“드디어 우리는 올랐다…안나푸르나 정상 8091미터에. 아아 우리 대원들 모두가 이 기쁨을 알아주었으면…”
대장 에르족은 그토록 순수한 환희를 제일 먼저 대원들과 나누고 싶어했다. 한편 그의 가슴에 히말라야 선구자들의 모습이 스쳤다. 머메리, 말로리와 어빈, 바우어, 벨첸바하, 틸만 그리고 십튼 등등. 그들 가운데 몇은 죽어서 히말라야 봉우리에 가장 아름다운 죽음의 터를 찾았다고 쓰는 일을 그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드 소쉬르와 에르족의 등정 소감은 무엇이 다른가? 그들의 차이는 알프스와 히말라야의 차이가 아니다. 드 소쉬르의 경우는 사람과 산의 첫 만남이고 에르족은 8000미터 고소를 처음 오른 성취감이 앞섰다. 소쉬르가 몽블랑 정상에서 영혼이 고양되고 자연의 장엄함을 느낀 데 대해 에르족은 등정 성취가 기뻤고 따라서 앞서 간 선배들이 생각났다.
이러한 감동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알피니즘에는 순진무구하며 고귀한 정신이 그 밑바닥을 흐르고 있었다. 그러한 등산가들의 마음가짐은 적어도 미지의 세계가 있는 한 존속했다.
그런데 에르족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히말라야 고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한 사람이 65,000달러를 주고 세계 최고봉에 오르는 상업주의 등반의 경우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등산은 도전이나 성취나 자기 극복의 차원을 벗어나 오로지 과시와 경쟁의 무대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는 등산계에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조지 말로리의 시신을 75년만에 찾은 것은 등산의 역사, 그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1924년 말로리와 어빈의 실종은 원정 과정에 흔히 있는 조난 사건과는 달리 그것을 둘러싸고 그들의 에베레스트 등정 여부가 오랫동안 쟁점이 되어 왔다. 당시 에베레스트가 세계 최고봉으로 미답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에베레스트가 최고봉이 아니었던들 그리고 미답봉이 아니었던들 이러한 조난이 세기적 수수께끼로 번지고 반세기 동안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왔을 것인가?
그런데 알피니즘의 세계에서는 등산보다 하산 때 극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산을 오를 때에는 목표를 지향하는 정신적 긴장과 왕성한 체력이 힘이 되는데, 산을 내려올 때에는 오랜 산행으로 그리고 목표를 달성했다는 안도감 내지는 실패로 인한 허탈감 등으로 심신의 긴장이 풀린다.
하산 때 조난 사건으로 역사적이고 기록적인 것은 1865년 마터호른(Matterhorn․4478m)에서 일어났다. 즉 윔퍼가 문제의 마터호른 등정에 성공하고 내려올 때 로프가 끊어지면서 일행 7명 가운데 4명이 1000미터를 추락했다. 당시 마터호른의 등정은 알프스 4000미터급 고봉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이른바 등산 역사에서 ‘골든 에이지’를 기록하는 장거였다.
또한 하강 때 참사로 역사에 남은 것은 알프스의 아이거(Eiger․3970m) 북벽에서 일어났다. 1936년7월 독일의 힌터슈토이서와 쿠르츠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라이너와 앙게러 2인조와 만나 함께 등반하고 있었다. 선등자 힌터슈토이서가 어려운 구간에 로프를 걸어 돌파에 성공하자 모두 무사히 건너갔다. 그런데 힌터슈토이서가 빨리 오를 생각만 하고 그 로프를 회수한 것이 끝내 화근이 됐다 그들이 전진을 계속하려고 했을 때 오스트리아 조가 낙석으로 부상하고 뒤에 처지는 바람에 그들은 클라이머의 우정과 의리로 등반을 중단하고 후퇴하기로 했다.
아이거 북벽에서 다시없는 참극이 이때 일어났다. 문제의 로프가 설치됐던 구간은 ‘힌터슈토이서 쿠베르강’으로 이름이 붙고 아이거의 명소가 됐지만, 이곳에서 초등을 노리던 4명의 클라이머가 결국 차례로 추락하고, 토니 쿠르츠만이 3일 동안 구조를 기다리며 안간 힘을 쓰다 꽁꽁 얼어서 로프에 매달린 채 숨을 거두었다. 쿠르츠의 악전 고투를 묘사한 하인리히 하러의 <하얀 거미>는 눈물 없이 읽을 수가 없다
등정의 경우 정상에서 흔히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여기 끌려가서 우는 독자는 별로 없다. 그런데 하산 기록에 독자가 감정 이입으로 목이 메는 수가 있다. 1953년 헤르만 불의 낭가파르바트 하산이 대표적이다. 불이 혼자 8125미터 정상을 밟고 내려올 때 그는 전무후무한 비박을 하고, 천신만고 끝에 고소 캠프로 돌아왔다. 그때 그를 기다리던 친구가 불을 보자 등정 여부를 묻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이 기뻐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극한의 세계에서 비로소 보게 되는 참다운 우정이요 인간미다.
그런데 1978년 세기적인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반 뒤 메스너가 하산 길 사우스 콜에서 쓰러지며 같이 갔던 하벨러에게 자기를 버리고 혼자 가지 말라고 울부짖던 장면에 눈물이 나지 않은 까닭을 나는 모르겠다.
하산 없이 등산도 없다
등산과 하산, 또는 등반과 하강은 알피니즘의 알파와 오메가요 기본 틀이다.
등산은 오르는 일을 목적으로 삼지만 필경은 하산이라는 수단으로 그 행위와 과정이 끝난다. 그래서 등산은 반드시 하산을 예상하며 하산은 언제나 등산이 그 전제가 된다. 등산과 하산 사이에는 원래 그 뜻에 경중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등산과 하산의 상호 관계는 한낱 알피니즘의 외형일 뿐 알피니즘이 안고 있는 내부 세계는 이러한 형식 논리로는 알 수가 없다.
등산과 하산에는 저마다 독자적인 세계가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하산이 등산보다 한층 더 심오한 정황을 연출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등산이 주개념인 데 대해 하산이 종개념이라는 숙명에서 온다.
등산은 알피니스트의 수만큼 있다’고 기도 레이(Guido Rey․1861~1935)가 말했다. 등산의 형식과 내용이 산에 오르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이야기다. 또 등산은 시대에 따라 그 생각과 어려움이 달라진다. 초등과 재등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초창기 개척자들이 지녔던 등산관이나 그들이 부딪쳤던 곤란과 위험은 현대의 첨예 등산가들과 큰 차이가 있다.
1787년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Mont Blanc․4807m)을 두번째로 오른 스위스의 과학자 드 소쉬르는 이런 글을 남겼다.
“인간의 영혼이 고양되고 넓고 장대한 지평이 눈앞에 벌어졌다. 고요와 장엄함이 주위를 감싸는 가운데 대자연의 소리가 바로 들려오는 듯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오늘날 몽블랑은 산을 조금 안다는 사람이라면 안내인을 앞세우고 어려움 없이 오르내리거나, 케이블카로 에귀 드 미디(3848m)에 올라 눈앞에 몽블랑을 바라본다. 그 옛날 공포와 미지의 세계였던 곳이 이제 일상 생활 속에 들어오다시피 했으니 드 소쉬르의 감동은 다시 느끼기 어렵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몽블랑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구의 어느 고산에서도 그렇게 고양된 감동을 토로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인간으로 8000미터 고소에 제일 먼저 오른 것은 1950년 프랑스의 모리스 에르족과 루이 라슈날의 안나푸르나(8091m)등정이다. 그때의 감회는 어떠했는가.
“드디어 우리는 올랐다…안나푸르나 정상 8091미터에. 아아 우리 대원들 모두가 이 기쁨을 알아주었으면…”
대장 에르족은 그토록 순수한 환희를 제일 먼저 대원들과 나누고 싶어했다. 한편 그의 가슴에 히말라야 선구자들의 모습이 스쳤다. 머메리, 말로리와 어빈, 바우어, 벨첸바하, 틸만 그리고 십튼 등등. 그들 가운데 몇은 죽어서 히말라야 봉우리에 가장 아름다운 죽음의 터를 찾았다고 쓰는 일을 그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드 소쉬르와 에르족의 등정 소감은 무엇이 다른가? 그들의 차이는 알프스와 히말라야의 차이가 아니다. 드 소쉬르의 경우는 사람과 산의 첫 만남이고 에르족은 8000미터 고소를 처음 오른 성취감이 앞섰다. 소쉬르가 몽블랑 정상에서 영혼이 고양되고 자연의 장엄함을 느낀 데 대해 에르족은 등정 성취가 기뻤고 따라서 앞서 간 선배들이 생각났다.
이러한 감동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알피니즘에는 순진무구하며 고귀한 정신이 그 밑바닥을 흐르고 있었다. 그러한 등산가들의 마음가짐은 적어도 미지의 세계가 있는 한 존속했다.
그런데 에르족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히말라야 고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한 사람이 65,000달러를 주고 세계 최고봉에 오르는 상업주의 등반의 경우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등산은 도전이나 성취나 자기 극복의 차원을 벗어나 오로지 과시와 경쟁의 무대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는 등산계에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조지 말로리의 시신을 75년만에 찾은 것은 등산의 역사, 그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1924년 말로리와 어빈의 실종은 원정 과정에 흔히 있는 조난 사건과는 달리 그것을 둘러싸고 그들의 에베레스트 등정 여부가 오랫동안 쟁점이 되어 왔다. 당시 에베레스트가 세계 최고봉으로 미답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에베레스트가 최고봉이 아니었던들 그리고 미답봉이 아니었던들 이러한 조난이 세기적 수수께끼로 번지고 반세기 동안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왔을 것인가?
그런데 알피니즘의 세계에서는 등산보다 하산 때 극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산을 오를 때에는 목표를 지향하는 정신적 긴장과 왕성한 체력이 힘이 되는데, 산을 내려올 때에는 오랜 산행으로 그리고 목표를 달성했다는 안도감 내지는 실패로 인한 허탈감 등으로 심신의 긴장이 풀린다.
하산 때 조난 사건으로 역사적이고 기록적인 것은 1865년 마터호른(Matterhorn․4478m)에서 일어났다. 즉 윔퍼가 문제의 마터호른 등정에 성공하고 내려올 때 로프가 끊어지면서 일행 7명 가운데 4명이 1000미터를 추락했다. 당시 마터호른의 등정은 알프스 4000미터급 고봉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이른바 등산 역사에서 ‘골든 에이지’를 기록하는 장거였다.
또한 하강 때 참사로 역사에 남은 것은 알프스의 아이거(Eiger․3970m) 북벽에서 일어났다. 1936년7월 독일의 힌터슈토이서와 쿠르츠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라이너와 앙게러 2인조와 만나 함께 등반하고 있었다. 선등자 힌터슈토이서가 어려운 구간에 로프를 걸어 돌파에 성공하자 모두 무사히 건너갔다. 그런데 힌터슈토이서가 빨리 오를 생각만 하고 그 로프를 회수한 것이 끝내 화근이 됐다 그들이 전진을 계속하려고 했을 때 오스트리아 조가 낙석으로 부상하고 뒤에 처지는 바람에 그들은 클라이머의 우정과 의리로 등반을 중단하고 후퇴하기로 했다.
아이거 북벽에서 다시없는 참극이 이때 일어났다. 문제의 로프가 설치됐던 구간은 ‘힌터슈토이서 쿠베르강’으로 이름이 붙고 아이거의 명소가 됐지만, 이곳에서 초등을 노리던 4명의 클라이머가 결국 차례로 추락하고, 토니 쿠르츠만이 3일 동안 구조를 기다리며 안간 힘을 쓰다 꽁꽁 얼어서 로프에 매달린 채 숨을 거두었다. 쿠르츠의 악전 고투를 묘사한 하인리히 하러의 <하얀 거미>는 눈물 없이 읽을 수가 없다
등정의 경우 정상에서 흔히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여기 끌려가서 우는 독자는 별로 없다. 그런데 하산 기록에 독자가 감정 이입으로 목이 메는 수가 있다. 1953년 헤르만 불의 낭가파르바트 하산이 대표적이다. 불이 혼자 8125미터 정상을 밟고 내려올 때 그는 전무후무한 비박을 하고, 천신만고 끝에 고소 캠프로 돌아왔다. 그때 그를 기다리던 친구가 불을 보자 등정 여부를 묻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이 기뻐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극한의 세계에서 비로소 보게 되는 참다운 우정이요 인간미다.
그런데 1978년 세기적인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반 뒤 메스너가 하산 길 사우스 콜에서 쓰러지며 같이 갔던 하벨러에게 자기를 버리고 혼자 가지 말라고 울부짖던 장면에 눈물이 나지 않은 까닭을 나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