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회연혁
양정산악부의 탄생은 길게는 20여년, 짧게는 10여 년간의 여명기를 거쳐 1934년에 비로소 '하이킹부'란 명칭을 '산악부'로 개칭하고 최기덕(22회)을 리더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27년 일본 입교대 영문과 출신이며 걸출한 등반가였던 황욱 선생이 양정학교에 부임하면서 30년대 초반부터 암벽등반 기술을 학생들에 전수하였으며 외국등반가들의 활동사, 고봉정복 기록, 산악인들의 저서를 수집하여 연구하였습니다. 1937년 3월, 설중 지리산을 최기덕(초대회장, 중22회) 리더를 중심으로 5명의 등반대가 국내 최초로 종주하여 국내 각 신문사에 대서특필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부원들의 숙원이던 학교에서 인정하는 운동부로 정식등록하게 됨으로서 공식적인 '양정산악부'의 탄생이 이루어졌습니다. | |
1930년대는 전시 일본의 포화소리가 그치지 않는 가운데도 불구하고 서울 근교 산행 및 오대산, 설악산, 박연폭포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1939년 주봉에서 노정환(24회) 회원이 유명을 달리하는 추락사고도 있었습니다. 1940년대는 질적, 양적으로 풍부한 등반이 많이 이루어진 해였다. 함경북도 차일봉, 북수백산, 운수백산을 필두로 동계 속리산 등반 및 백두산 하계 등반을 실시하였으며 금강산 집선봉 암벽등반과 금강산 적설기 스키등반, 함경북도 관모봉, 설악산 동계등반을 실시하였습니다. 1945년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해방 이후의 산행은 갖가지 소요와 사건으로 인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서울근교의 암벽등반과 기술연마 훈련이 되풀이 되었고, 그 와중에도 지리산 스키대회 산악계주 우승 및 적설기 지리산 스키등반, 울릉도 탐사 등이 진해되었습니다. 1950년대는 6.25의 발발로 잠시 활동이 정체되었다가 수복 후 산악부를 재결성하여 서울 근교 암벽등반 및 제1회 전국고등학교 '크로스컨추리' 대회에서 우승을 하였으며 한국산악회 주최 등행경기대회에 참가하여 1위부터 7위를 휩쓰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제1회 하기 학생해양훈련대에 참가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탐샇고 휴전 후 첫 설악산 원정을 실시하였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선 양정산악부는 창립이래 가장 많은 산악부원을 배출하며 주말을 이용한 서울 근교에서의 암벽등반과 하계, 동계 장기 등반, 그리고 1년에 3회 정도 치러진 각종 전국규모 등반대회에 참가하여 우승을 휩쓸면서 산악부의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1966년에는 산악부 출신 동문들을 주축으로 공식적인 양정산악회가 출범하였으며, 산악회의 활동을 보고하는 격월지인 '양정 악우'를 발간하였습니다. 1968년에는 한일 친선등반을 설악산 일원에서 실시하였으며 1969년 2월 한국산악회가 히말라야원정을 앞두고 실시한 설악산동계훈련에서 부대장을 맡고 있던 김동기회원(32회)이 눈사태로 유명을 달리했으며, 동년 추렌히말 원정대의 일원으로 본회 소속 회원이 참가했습니다. 1970년을 맞은 양정산악회는 그간 축적된 경험과 회원들 간의 끈끈한 유대를 바탕으로 활발한 산행활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1974년 8월 15일 인수A코스에서 재학생 3명이 기상악화로 조난사하였으며 그 합동비는 현재 인수봉이 바라보이는 영봉 능선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양정산악인의 잠재력은 6,70년대 성장기를 거쳐 80년대에는 한국의 해외 고산원정을 주도하는 양상으로 분출되었습니다.
양정산악부에서 배출된 회원들이 대학 및 일반산악회, 국가 산악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고산원정 러시의 주도자로 부상한 것입니다.
1980년 양명수(55회) 회원이 마나슬루 원정에 참가하였습니다.
1982년 김기혁(55회) 심상돈(57회) 임병길(59회)회원이 은벽산악회와 합동으로 네팔 히말라야의 닐기리 중앙봉 원정이 있었고, 전원이 등정하는 쾌거를 올렸으며 특히 심상돈(57회)회원은 하산 도중 은벽산악회 김광대원이 발목골절상을 입자 그를 후송하느라 10일간의 악전고투 끝에 구조에 성공하였으며 이는 우리모두의 표상이 되였습니다.
또한 양정의 저력은 한국대학산악연맹의 알프스 원정대 참가 에베레스트 정찰, 마칼루 원정대 참가, 아이거북벽 등정, 푸모리 남릉 동계 초등, 아마다블람 동계 초등, 강가푸르나 등정, 자누봉 동계초등, 동계 에베레스트 서릉 등반, 또한 남선우(56회) 회원 에베레스트 단독 등정이라는 눈부신 비약을 거듭하며 한국 산악사의 큰 획을 장식했습니다. 특히 1984년 양정산악회는 단위산악회로서는 최초로 그 동안 쌓아온 경험과 팀워크를 바탕으로 동계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결성하여 장도에 올랐으나 강풍과 폭설로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77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이후 2번째로 시도되는 것이어서 국민과 매스컴의 기대에 힘입어 의욕적으로 시도되었으나 계속되는 악천후로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원정은 이후 한국산악계에 계속적으로 에베레스트 원정을 결성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8년 11월, 양정산악회는 분단이후 남한인으로서는 최초로 중국쪽을 통해 백두산을 등정하는 쾌거를 이룩했으며 이는 양정산악부가 1943년 백두산을 등정한지 45년만의 일이어서 더욱 뜻 깊었습니다. 대원으로는 홍용표(44회)원정대장, 고순호(37회), 김기덕(39회), 최용호(44회), 황청웅(45회), 심종보(46회), 강복남(49회), 송익재(49회), 전석훈(57회), 우석희(61회), 박정헌(63회) 회원이 참가했습니다. 또한 1989년에는 재미회원인 오홍조(39회)회원이 분단이후 첫 금강산을 올랐습니다. 1990년대 들어 창립 60주년을 맞는 양정산악회의 활동은 졸업생들이 국내외에서 꾸준한 활동을 보여준 반면에 재학생은 침체되어 저조한 현상을 보였습니다. 1991년은 김명수(46회)회원이 중국 티벳을 경유하여 초오유, 시샤팡마 원정대의 대장으로 참가하였으며 남선우(58회)회원은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 등반대장으로 참가하였고 92년도에는 초오유, 시샤팡마 연속등정이라는 쾌거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또한 일본 남알프스 후지산 등반과 고인경(45회) 회원이 에베레스트 원정대 단장으로 티벳으로 진출, 이 원정대의 대원이 국내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북면에서 남면으로 횡단하는 업적을 이루어내었습니다. 1994년 양정산악회는 창립 60주년 기념으로 구소련 코카서스 지역으로 원정대를 파견하여 엘브루즈와 우쉬바 북봉을 등정하였습니다. 대원으로는 홍용표(44회)원정대장, 황규성(41회), 김백수(59회), 석채언(63회), 박정헌(63회), 조상현(68회), 김근생(68회), 김병구(72회)회원이 참가했습니다. 90년대의 양정산악 활동은 양정산악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한지 60주년을 맞는 1997년에 커다란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양정산악 60년사' 의 출간입니다. 이것은 비단 양정 산악인들만의 경험된 추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산악계의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되었습니다. 1996년에는 주봉에서 고 노정환(24회) 회원의 추모비 제막식을 거행하였으며, 1999년 여름에는 중국 청도(칭따오)에 있는 노산의 암벽인 경천주봉을 수차례의 답사 및 정찰 끝에 양정길(3개코스)과 하강루트를 개척하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2005년에는 양정 창학 100주년 기념 2005 한국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가 꾸려졌습니다. 양정산악회 20년 숙원인 에베레스트 정상에 김근생(68회) 회원이 현지 시간 2005년 5월 30일 오전 9시 55분에 등정하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45년 만의 악천후를 이겨내고 5만 양정인의 자긍심을 세운 쾌거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대원으로는 고인경(45회)단장, 정기범(49회)원정대장, 이창호(50회)등반대장, 조동식(52회)부대장, 남선우(56회), 홍성대(57회), 최응삼(57회), 안일섭(61회), 김영오(62회), 박정헌(63회), 김근생(68회), 김병구(72회), 방원식(84회) 회원이 참가했습니다. 2007년 양정산악회는 창립 70주년을 맞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양정산악 70년"을 발간하였습니다. 1930년대 일제하에서 민족주의자 김교신 선생과 선구적 산악인 황욱 선생의 지도아래 순수 산악활동을 펼친 선배들의 궤적과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귀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2008년7월6일 영봉능선 과 주봉에 자리하고 있던 추모비를 북한산 합동추모탑으로 옮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