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 2명 눈사태에 희생

by 관리자 posted May 1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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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 2명 눈사태에 희생


  



‘세계의 정상’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한국 최초의 새 길을 열고자 했던 산 사나이들이 불의의 사고로 귀한 목숨을 잃었다.

에베레스트 등정 30주년 기념 원정에 나섰던 박영석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한국일보ㆍ대한산악연맹ㆍSBS 후원)의 오희준(37ㆍ골드윈코리아) 부대장과 이현조(35ㆍ골드윈코리아) 대원은 16일 정상을 눈앞에 두고 안타깝게 산화했다.

오 부대장과 이 대원은 이날 오전 1시 50분(현지시간)께 에베레스트 남서벽 공격캠프 4(C4ㆍ해발 7,800m)에서 머물던 중 갑작스러운 눈사태에 캠프가 휩쓸리면서 사고를 당했다. 두 사람은 17일로 예정됐던 1차 정상 도전을 위해 이날 C4를 출발해 해발 8,300m인 C5에 오르기 위해 대기중이었다.

박영석 원정대는 “지난 밤 폭설이 쏟아져 곳곳에서 눈사태가 일어났다”며 “C4에 머물던 오 부대장과 전진베이스캠프(ABCㆍ해발 7,400m)에 있던 박영석(44ㆍ골드윈코리아) 대장이 폭설에 따른 진퇴 여부를 놓고 무전으로 통화하던 중 새벽 1시 50분께 갑자기 ‘콰과광’ 큰 눈사태 소리가 난 직후 교신이 끊겼다”고 전했다. 당시 C4 텐트에는 오 부대장과 이 대원만 남아있었다.

박 대장과 나머지 대원들은 날이 밝자마자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두 대원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17일 오전까지 베이스캠프(5,460m)로 옮길 예정이다. 시신은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까지 헬기로 옮겨진뒤 서울로 운구된다. 원정대도 철수한다.

박영석 원정대가 이번에 도전한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정상(8,848m)까지 수직 고도가 2,500m에 달하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매우 험난한 구간이다. 원정대는 남서벽에 한국에서는 처음 ‘코리안 신루트’를 개척할 계획이었다.

제주 출신의 오 부대장은 1999년 네팔 초오유 등반을 시작으로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0개를 올라 박영석, 엄홍길(48), 한왕용(41) 등이 기록한 14좌 완등을 눈 앞에 두고 있던 세계적인 산악인이다.

전남 영광군 출신의 이 대원은 2005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을 등반, 세계 산악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인물이다. 루팔벽은 에베레스트 남서벽과 함께 난코스로 이름 높은 곳으로 1970년 라인홀트 메스너가 오른 이후 35년 만에 이 대원이 처음 등정에 성공했다. 오 부대장과 이 대원은 박 대장과 2003년 북극점, 2004년 남극점 도달에도 함께 했다.

한편 이날 사고 소식을 전해들은 오 부대장의 형 희상씨는 “1주일 전 베이스캠프에 머물던 동생과 전화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며 “집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4명의 자식 중 가장 부모님을 기쁘게 해주는 아들이었다”고 침통해 했다.

또 이 대원의 전남대 산악회 선배로 지난해 에베레스트에 같이 오르기도 했던 김형필씨는 “순박하고 깨끗한 후배였다”면서 “현조가 보낸 편지를 엇그제 받았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코리안 신루트 개척 꿈 설산에 묻히다
에베레스트 원정대 2명 눈사태에 희생… 사투의 현장
정상까지 수직벽 2500m 최대 난코스에 좌절
폭설 후 눈사태 덮쳐… 시련 헤친 도전 '마침표'



고(故) 오희준(왼쪽) 부대장과 이현조 대원이 에베레스트 남서벽 루트 개척에 나선 모습. 뜻밖의 눈사태에 희생된 이들은 결국‘코리안 루트’ 개척의 꿈을 날 선 남서벽에 묻어야만 했다. 박영석 원정대 제공



에베레스트의 여신은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정상을 향하던 두 한국 산악인의 투혼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영원히 아로새겨질 것이다.


고 오희준(37ㆍ골드윈코리아) 부대장과 이현조(35ㆍ골드윈코리아) 대원이 목숨을 잃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은 히말라야에서도 손꼽히는 난코스다. 정상까지 수직의 벽 높이만 2,500m에 달한다.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첫 도전때 추락사고를 당했던 박영석(44ㆍ골드윈코리아) 대장은 그 이후 반드시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단 루트를 뚫겠다고 다짐했다. 오 부대장도 “히말라야 14좌 완등보다 남서벽 도전에 더 큰 의미를 둔다”며 “히말라야에 코리안 루트를 내는 것은 필생의 꿈”이라고 강한 의지를 보여왔다.

박영석 원정대의 계획은 15일 전진베이스캠프(ABC)인 공격캠프 2(C2ㆍ해발 7,400m)에서 오 부대장과 이 대원 조가 C4(7,800m)로 출발, 16일 해발 8,300m에 C5를 구축하고는 다음날 1차 정상(8,848m) 공격에 나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박 대장을 뒷받침해 팀을 이끄는 최고의 베테랑들. 결국 정상 공격의 임무는 그들에게 맡겨졌다.


15일 밤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자정을 넘긴 이른 새벽 여기 저기서 크고 작은 눈사태 소리가 들려오자 오 부대장은 C2에 있는 박 대장을 무전으로 찾았다. 박 대장과 철수 여부 등 향후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서 였다. 눈사태가 오 부대장과 이 대원이 머물고 있던 텐트를 덮쳤다. 갑자기 교신이 끊긴 무전기에선 암연 같은 침묵만 전해졌다.


에베레스트 등정 30주년 기념으로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 신루트를 개척하려던 박영석 원정대의 도전은 처음부터 크고 작은 난관에 부딪혔다. 기상 불안으로 캐러밴 출발지인 루크라(해발 2,840m)까지 오는 비행기가 뜨지 못해 하루 늦게 도착했고, 베이스캠프까지 원정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예약해놓은 야크를 다른 원정대가 가로채는 바람에 애를 먹기도 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는 이재용(36) 대원이 갑자기 몸이 나빠져 결국 귀국해야 했고, 대원들은 셰르파들의 잦은 파업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남서벽 도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 셰르파들은 돈도 싫으니 그냥 내려가겠다고 시위를 벌였고, 몇 명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철수해버렸다. 결국 박 대장이 “길은 우리가 앞에서 뚫을 테니 셰르파들은 밑에서 짐만 올려주면 된다”며 몇 번을 달래야 했다. 본격 정상공격에 나선 7일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셰르파중 2명이 또 내려가, 원정대원 6명과 셰르파 4명만 남은 채 나머지 공격에 임했다.


남서벽 루트 개척에 성공했던 1975년의 영국 크리스 보닝턴대는 108명의 대원이, 82년 구소련대는 27명의 대원과 엄청난 물량공세가 성공의 밑거름이었다.

박영석 원정대 홈페이지에 남긴 원정대 일기는 “다른 원정대는 셰르파가 앞에서 길을 트고 짐까지 다 들어주는 반면, 우리는 대원이 직접 20~30kg의 짐을 지고 직벽에 로프를 치며 앞장서 나가야 한다”고 적고있다.



원정대가 이 모든 난관과 맞서면서도 험난한 남서벽을 올랐던 힘은 한국 산악인의 독기와 근성이었다. 대원들은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오르자”며 “ 남서벽 신루트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산을 떠날 때 가슴에 맺힌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리자”고 서로를 격려했다. 그러나 대자연은 무심했다. 가늠할 수 없는 신의 의지 앞에서 대원들은 가슴에 동료를 묻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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