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경천주봉 개척 등반기 (99년 8월)--송익재

by 김근생 posted May 1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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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암벽 개척; ‘중국 인수봉’에 바윗길 내다
청도 노산 시등…경천주봉에 양정길 개척;


글. 송익재 양정산악회 회원



88년 11월 백두산 산행 후 7년만인 95년 6월 또다시 백두산을 오른 다음 청도(靑島)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청도는 산과 바다가 있는 깨끗하고 매력적인 도시였다.

산동반도 아래, 우리나라 군산과 같은 위도상에 위치해 있는 청도는 경기도보다 큰 인구 600만 명(청도시만 200만 명)의 광역시로 상해, 대련에 이은 3대 항구도시이자 중국 12대 도시다.

예전 독일의 조차지였던 청도에는 아직도 시내엔 독일식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청도는 풍광이 아름다운 도시로 8개의 해수욕장과 국제규격의 골프장이 2곳 있다.
또한 해산물이 풍부한 덕분에 해산물 요리가 유명한 데다 시 가까이 노산( 山勞山)이라는 국립공원이 있어 산동지방 최대의 관광지이자 북해함대 사령부와 해군박물관이 있는 군사도시이기도 하다.

개방 이후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하여 그 종사자와 가족들이 3만여 명에 이른다.
그곳엔 양정고 시절 산악부 활동을 같이 하던 35년 산우(山友)인 김상일군이 중원계량기유한공사라는 중소기업의 총경리(사장)로 근무하고 있다.

**인수봉 연상케 하는 경천주봉 등반

95년 방문했을 때 김군은 매주 회사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노산을 홀로 찾아 등산로를 개척하고 있을 때여서 우리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노산을 찾아 여러 곳을 둘러봤다.
그런데 관광지 앙구(仰口·Yang Kou)에서 리프트를 타고 오르는데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암릉 중앙에 인수봉을 닮은 거대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야! 저거-. 나이도 잊은 채 주책없이 가슴속에서 무언가 꿈틀댔다.

나의 악우 상일이는 벌써부터 서서히 그러나 세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몇 달동안은 매일 새벽 차로 1시간을 달려와 암장 근처까지 뛰어오르기도 했고 주말이면 암장 진입로의 정글을 헤치며 이름하여 경천주봉(擎天柱峰)을 한 바퀴 돌며 루트파인딩을 하고 귀국할 때마다 암벽장비를 하나하나 구입해갔다.
전동드릴, 점핑세트, 볼트, 슬링, 카라비나 등등.

나는 귀국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젊은 후배들에게 노산의 암장을 이야기해주며 서서히 유혹(?)해갔다.
바위를 좋아하는 친구들이라 당연히 세뇌(?) 당할 수밖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해외원정인지라 대원들의 직장, 시간, 여비 등 여러 문제가 걸렸으나 양정산악회 고인경 회장의 배려와 최병덕(32회), 윤효기(41회), 김명수(46회), 심종보(46회)
선배들의 참여와 현지 김상일 동문의 숙식과 차량 제공으로 원정에 나설 수 있었다.

팀의 윤곽이 잡혀갈 즈음인 지난 7월 초 답사차 청도를 방문하여 그곳 청도산악회 회원들과 4차에 걸쳐 노산을 등반하며 점 찍어둔 경천주봉과 2차로 해안도로에서 접근이 용이한 제2의 대상지를 선정하여 촬영 후 귀국, 어렵사리 준비 끝에 드디어 7월31일 오후 2시30분 김포를 떠났다.

이륙 후 1시간10분만에 청도에 도착하니 어느 후배는 “이거
강북에서 논현동 가는 시간보다 빠르네”라고 말한다. 공항에 도착하니 상일군이 차를 가지고 마중나와 있었다.
숙소인 공장도 10분만에 도착이다. 숙소도 호텔급이다. 대충 짐 정리를 마치고 40여 분 걸리는 청도시내로 나갔다.
상일이가 시내 5성급 하이티안(Hai Tian·海天) 호텔에 환영 만찬을 예약해둔 것이다.

청도산악회 회장 심의섭씨와 회원들도 초청되어 훌륭한 요리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오랜만에 선후배간의 우의를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청도시 야경을 즐기며 숙소에 도착, 후일 산행을 대비해 일찍 취침, 위성TV를 보니 한국에는 물난리로 떠들썩하다.

8월1일 암벽팀과 산행팀으로 나누어 상일군은 김백수(59회), 안일섭(61회), 김종왕(67회), 김근생(68회), 조상현(68회),
김병구(72회), 방원식(2학년 재학)을 데리고 앙구로 출발하고,
나는 산행팀과 함께 청도산악회 회원들의 안내로 북구수(北九水)로 각기 출발했다.

산행팀은 북구수에서 30여 분 오른 후 울죽암(蔚竹庵)이라는
자그만 도교암자에서 녹차를 대접받고(산림감시원이 상주함) 1시간여 올라 울죽령(청도산악회가 명명) 갈림길(약 950m 고지)에서 암벽팀이 있는 앙구쪽으로 접어들었다.

울창한 숲길을 한참 가다 넓은 너럭바위 위에서 중식을 마친 후 예의 경천주봉 아래에 오니 약 7시간이 소요됐다. 사인을 보내니 바위 위쪽에서 희미하게 대답이 왔다.
그런데, 심 회장께서 시내에 청도산악회가 환영 만찬을 예약해 놓아 시간이 없다며 하산하잔다.
따를 수밖에. 리프트로 하산하니 미니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시내로 향하며 하루 산행으로 친숙해진 두 팀은 윤효기 선배의 너스레로 피로를 풀며 예약해둔 대주점(大酒店)으로 이동해 너무나 푸짐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불가사리 요리에는 모두들 놀랐다.

미니버스로 숙소까지 데려다주어 목욕 후 거실에 모여 암벽팀의 상황이 궁금하여 상일군의 핸드폰으로 연락하였으나 불통이다. 밤 10시30분쯤 상일군에게서 전화가 왔다.
거의 정상부까지 올랐고 하강을 끝내니 어두워져 하산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하이에르 호텔(Haier Hotel·한국의 삼성전자 같은 그룹에서 운영하는 2급 호텔)에서 저녁 식사 후 그곳에 팀을 재우고 상일군만 숙소로 온단다.
안심이다. 1시간쯤 지난 뒤 상일군이 도착하여 암벽팀의 상황을 듣고 취침에 들어갔다.
서울에서는 계속 물난리라고 TV에서 떠든다. 걱정이다.

**바위 날카로워 하강에 애먹어

2일. 암벽팀은 호텔에서 암장으로 출발하고, 산행팀은 숙소를 출발, 암벽팀 격려차 암장 아래까지 진출하는 데도 힘들다. 암벽팀과 점심을 같이 하고 절대 안전을 당부하며 먼저 하산한다. 20m 높이로 목숨 ‘壽’ 자를 새겨놓은 ‘天下第一壽(천하제일수)’ 바위 앞을 지날 때 우연히 뒤돌아보다 정상에서 나부끼는 오렌지 깃발(양정의 상징색)을 발견했다.
50대 후반의 나이, 환갑이 지난 나이, 70이 눈앞인 선배들이 모두들 아이들처럼 목청 높여 콜사인을 보낸다. “Y~C~!, Y~C~!” 노산이 떠나갈 듯이….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눈이 휘둥그레진다. 모두들 가슴 뭉클해하는 모습들이 역력하다. 오렌지 핏줄이던가?

나는 망원렌즈를 꺼내 정신없이 눌러댔다. 정상의 후배들도 알아들었는지 깃발을 흔든다.
녀석들이 미지의 암장을 오른 것이다. 첫번째로 오른 것이다.
난이도는 인수봉의 기존B코스 정도라지만 어쨌든 산동 청도에서는 처음 개척된 루트일 것이다.

인간들의 오름짓은 태고적부터 이루어진 본능이다. 생계수단으로, 종교적 개념으로, 군사적 목적으로, 또는 호기심으로. 그러나 심신의 여유가 생기면 스포츠 개념이 도입되고 발전하여 고난도 변형 루트 개념이 도입된다.
등산을 부르주아들의 놀음이라고 생각했던 사회주의 체제의
중국에서도 이제는 서서히 오름짓이 시작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기에….

그곳 관광객들은 우리들의 이상한 복장과 배낭, 스틱이 신기한 듯 힐끗 힐끗 쳐다본다.
옛날 양정고보생들을 이끌고 등산을 가르치던 황욱 선생님이 대학시절인 1920년대 초 평양거리에 니커보커즈 복장에 자일을 메고 다니면 평양 사람들은 신기해 했다고 했다.
우리들이 이들에게 그런 모습으로 비치는 게 아닐까?

물론 가장 많은 인원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렸고,
아시아인공암벽대회를 2회씩이나 열고 있는 중국인들이지만,
에베레스트를 오른 것은 군인들이었고 인공암벽대회에 참가한 사람들도 체재 안의 몇 사람에 불과하다. 대중화는 아직 안됐다. 그러나 곧 급속히 발전할 것이다.

언젠가는 오늘 후배들이 오른 길을 그들도 오를 것이다.
그리고 경천주봉 정상에 박힌 하강 피톤에 새긴 ‘養正山岳會 1999. 8. 2’라는 글씨를 보게 될 것이다.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을 왜일까?
인수봉 초등을 외국인에게 잃어버린 것을 뒤늦게 안 뜻있는
옛 선배 청년들의 눈물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너무 심한 의미부여일까?
모두들 밤 늦게 하산하여 자축연을 열고 피곤한 몸들을 쉰다.

오늘은 시등하는 날이다.
아침 일찍 서둘러 암장으로 진출했다.
2인3개조 각 팀 시등이다. 김근생·조상현 조는
확보용 볼트를 보강하며 오르고, 김종왕·김상일 2조, 김백수·송익재 3조로 시등한다.

넓고 좁은 크랙, 약간의 레이백, 침니 등 다양한 코스다. 바위들이 날카롭다.
어느 구멍 홀드 안에선 벌이 튀어나와 기겁을 하기도 했다.
다섯 마디를 올라 40m를 트레버스하니 정상부 아래다. 간단한 코스로 조금 오르니 정상이다.
시원한 황해 바다가 눈 아래 가득하다. 그야말로 상쾌하다. 뿌듯하다. 첫번째라는 의미는 여러 가지겠다. 자랑스러움, 자부심, 경외감-. 어쨌든 중국 노산은 우리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바람이 세다. 서둘러 촬영을 마치고 하강지점으로 내려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100m 자일 두 동으로 하강하는데 과연 생각한 대로 바위가 날카롭게 살아 있다.
자일 회수에 문제가 있어 조상현·김근생조가 중간에 볼트 작업을 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 작업조와 의견교환도 잘 안된다.

무전기를 가져오려다 외국에서 허가없이 사용하는 것이 문제 될까봐 안 가져온 것도 후회된다.
겨우 아래 지원조와 의사 소통 후 자일을 빼주고 올라온 곳으로 하강하는데 역시 자일 회수에 문제가 있다. 마모도 심하다.

하강을 마치니 깜깜하다. 지원조가 저녁밥을 잘 지어놓아 헤드랜턴을 켠 채 식사를 마친 다음 하산하니 상일군 회사의 조선족 직원인 차식군이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다. 모두들 피로하지만 뿌듯한 마음으로 무사 산행을 자축하며
후배들이 즉석 작사한 ‘노산가’를 부르며 숙소로 돌아오니
상일군이 미리 준비시킨 공장 식당의 만찬이 기다린다.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고맙다.
빼주’를 곁들여 식당에 시설되어 있는 노래방을 십분 활용하여 60대 후반부터 10대까지 격의 없이 노래하며 피로를 풀고 산악반가와 교가로 흥을 끝내고 모두 곯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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