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권씨의 중국 노산 등반 (김상일,송익재 회원 참가)

by 김근생 posted May 1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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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승권씨의 중국 노산 암벽등반기...


노산의 암벽등반
정 승 권

노산은 태고 적, 마치 하늘에서 돌 무덤미가 우박처럼 쏟아져 산 전체에 뿌려진 듯, 산이 온통 암봉과 암릉이며, 그 형상이 동양화 그림에서나 보는 듯, 특유의 화강암 색조가 화폭에 바탕색처럼 꽉 매우니, 드넓은 노산의 가을 깊은 화려한 단풍이 그저 수줍기만 하다.

청도에 근접해 있는 노산의 주요 등산 깃 점인 바닷가 마을 앙구에 도착했을 때 노산은 깊은 가을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곧바로 리프트를 이용해 산으로 들어가니 오밀조밀한 암봉들과 암벽면에 잘 발달된 크랙들은 침니 등반에서부터 다양한 쨈크랙과 오퍼지션크랙은 물론 5.13은 족히 나갈 적당한 길이의 휭거크랙들이 즐비했고, 게다가 페이스 등반루트로 적당할 한 피치 짜리의 암봉들이 우후죽순 솟아있다.

말 그대로 바위 천국이라고나 할까싶은 정도이다. 바위에 거대한 크기로 새겨진 여러 체의 壽는 이색적인 바위 풍광이었고, 글자사이로 난 크랙과 페이스들이 등반욕구를 자극시킨다.
이 수많은 암봉 중에 가장 높고 뾰족한 경천주봉으로 우리는 이동을 했다. 높이 150여 미터의 경천주봉은 3년 전 양정산악회에서 이 봉을 초등 할 때 만든 양정길이란 바윗길과 그 이후에 청도에 살고있는 한인들이 주축이 된 청도산악회에서 만든 두 번째의 바윗길이 있었다.

이 바윗길은 오래 전 양정산악회 소속이며 지금은 청도산악회 회원이고 청도에서 사업을 하고있는 김상일씨가 만들었으며, 같은 양정산악회 친구인 송익재씨와 함께 이곳에 전위적인 새로운 바윗길을 만들려고 우리를 초청하였고, 그래서 필자와 윤길수씨, 사진작가 손재식씨가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우리는 두 번째 바윗길의 등반과 새로운 바윗길을 만들려는 계획으로 이곳 앙구에서 2박 3일간 머물기로 했으며 짧은 기간이라 도착하는 날 곧바로 산으로 들어갔지만, 오후가 되면서 내리는 비로, 첫날, 등반과 새로운 바윗길을 위한 정찰은 아쉬움과 함께 하루를 공치게 되었다. 리프트를 이용하지 않고 잘 정돈된 계단 길을 따라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리프트를 타고 올라갈 때 본 거대한 글자들이 새겨진 바위 밑을 지나게 되었다.

그 곳에 난 크랙들을 등반하면 매우 재미있을 것 같아 보였으며, 바로 길 옆 인지라 앞으로 이곳에서 등반을 한다면 오며가며 지나가다 본 청도의 중국인들이 암벽등반에 매료되리라는 측측에 내일 경천주봉 등반이후에 시간이 된다면 이곳에 바윗길을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을 갖게 했다. 숙소로 내려와 뒷맛 좋은 청도 맥주로 목을 축이며 내일의 등반을 기획했다.

어제 구상한 오늘의 등반계획이 다시 어려움을 맞았다. 입산할 때 산신제를 지내지 않아서 노산이 심술을 부리는 듯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일요일인 관계로 청도산악회 회원이 중국인을 포함하여 4명이 더 합류하였고, 모두 9명이 3개조로 나누어 양정길을 오르기로 했으니 정찰 할 수 있는 여유시간이 부족할 듯 싶었다. 어째든 오늘은 정상에 꼭 올라가야 어떤 계획이든 세울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새로운 바윗길이 될 만한 곳을 찾아 하강하며 고정 볼트를 미리 설치해 놓고, 다음날 등반할 계획으로 최선책을 찾았다, 하지만 정상에 가까이 갈 수 록 거세지는 바닷바람과 천둥소리에 정찰은 고사하고 하강하기도 힘들어 탈출하듯 정상을 내려야만 했다.

다행히 하강 루트가 청도산악회에서 만든 두 번째 바윗길 쪽이라 그 길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침니부터 페이스까지 모든 암벽등반기술이 집약된 매우 재미있는 바윗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결국 등반 이틀째인 오늘도 새로운 바윗길 개척에 대한 아무런 진척도 없는 날이었지만, 중국인 2명이 포함된 총 9명의 한중 합동 등반대가 이루어져 경천주봉을 등반한 뜻 깊은 날이기도 했다.

이제 남은 일정은 내일 하루였다. 하루 남은 일정으로 경천주봉에 새로운 바윗길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이 새삼 우습기도 했지만, 내일은 김상일씨가 만든 바윗길을 등반하고, 하산길에 壽글자가 새겨진 바위에 난 크랙을 등반하는 것만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날씨가 따라주어야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어제 함께 등반한 미모의 박귀옥씨와 청도 해병전우회 정일국씨가 어제 나의 부탁을 저버리고 마지막날인 오늘 등반에 참여하지 않았다. 청도산악회의 암벽등반 이야깃거리가 재미있게 쓰여질 것 같기도 하고, 사진도 좋을 듯 싶어서였는데, 그래서 오늘 등반인원은 6명으로 줄었다. 나와 김상일씨 그리고 김상일씨가 암벽등반을 전수한 중국인 왕엔지와 왕에링이 4명이 함께 줄을 묶고, 사진촬영을 위해 윤길수씨와 손재식씨가 함께 줄을 묶기로 했다.

잡풀과 넝쿨을 헤치며 가야 하는 경천주봉의 접근로는 성가셨지만, 새로운 바윗길을 등반하러 간다는 설래 임은 무척이나 좋았다. 도착한 출발지점은 아늑한 동굴 같았고, 첫 피치는 보통 짜증스러운 침니등반과 달리 적당한 넓이의 매우 재미있는 긴 침니 등반 구간으로 아주 편안한 고전등반기술을 만끽 할 수 있었다.

김상일씨가 양정산악회 시절 60년대에 등반했던 분이라 등반 선이 매우 고전적이었다. 동굴을 탐험하는 듯 올라선 첫 피치 종료지점은 6명이 다 올라서도 부족함이 없는 매우 넓은 바위 안부였고, 든든한 두 개의 확보용 볼트는 덕수궁 돌담길 옆 가로등쯤으로나 비교를 할까. 확보지점에 설치된 두 개의 볼트는 매우 정교하게 안정되어 보였다. 삼일 동안 느낀 김상일씨의 꼼꼼한 성격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첫 번째 피치에 이어 두 번째 피치도 나는 김상일씨에게 선등을 부탁했다. 그런데 두 번째 피치는 쉽게 보이지도 않았지만 확보물 설치지점도 불안정해 보였다. 수직에 가까운 오퍼지션 크랙을 레이백자세로 오르다 반침니 자세로 바꾼 후 넓은 침니로 기어 들어가는 정통적인 고전적 고 난이도의 등반 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촬영 팀 선등자인 윤길수씨가 먼저 오르다 반 침니 구간에서 동작을 멎은 후 꼼짝 달싹을 못하고 아이고!를 연발한다.

김상일씨는 아주 유연하게 레이백 자세에서 반침니 자세로 바꾼 후 넓은 침니를 그림같이 올라 버렸다. 50이 넘은 나이에 타국땅에서 사업하며 등반열정까지 식지 않은 그분에게 존경심이 나지 않을 수 없는 두 번째 피치 구간이었고, 또 후회스러움에 빠져든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어제저녁, 오늘 등반계획을 토론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말을 청도 맥주의 취기에 빠져 알피니즘의 궁극은 공유하는 겁니다라는 말을 공자 앞에서 쓴 문자 같았기에 그랬다.

세 번째 피치는 사진작가인 손재식씨가 사진촬영을 위해 나에게 선등을 권했다. 오버행 턱 크랙을 째밍하며 올라 페이스 등반으로 이어지는 족히 5.11 정도의 난이도는 되어 보이는 이곳을 죽을 똥 싸는 나의 모습을 찍으려는 의도인 듯 싶었다. 어차피 나는 이번 등반에 광대이기에 윤길수씨의 등반이후 곧 선등해 나갔다.

김상일씨는 자유등반의 개념을 알고 있었고, 이 바윗길도 자유등반으로 오르기 위해 만든 바윗길이었다. 결국 우리는 완전한 자유등반으로 이 구간을 해결하지 못했지만 적당한 볼트위치와 변화무쌍하게 이어지는 등반선은 과히 요즘 등반세대 감각과 다를 게 없었다. 어쩌면 고전적 등반을 가미시킨 면에서 더 높이 평가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 이 세 번째 피치가 가장 어려운 구간으로, 이 곳을 자유등반 하려는 의도가 이번 등반계획에 짙게 깔려 있었으니, 이 작은 일에 김상일씨의 세심함이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직원인 왕엔지와 청도산악회 회원인 왕에링등 중국인에게 암벽등반을 어느 정도 꼼꼼하게 가르쳤는지를 그들이 무리 없이 잘 따라오는 모습을 보면서 짐작 할 수 있었다.

네 번째 피치는 슬랩성 페이스로 이어지는 적당한 볼트거리의 재미있는 구간이었다. 게다가 앙구 마을의 앞 바다가 장쾌하게 보였다. 마치 설악산 울산암을 등반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노산 바닷가는 울산암에서 보는 바닷가보다는 더욱 가깝게 있었다. 네 번째 피치 종료지점은 6명이 다 누워도 여유가 남을 넓은 테라스였다. 윤길수씨가 제일 먼저 올라와 기다리느냐고 추위에 몹시 떨었는지 마지막 한 피치를 남겨두고 하강을 하자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는 나는 달래보았지만 이미 그에 입은 얼어있었다.

김상일씨도 마지막피치는 지금 등반한 네 번째 피치와 비슷하다고 하며 하강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내가 가자고 고집했으면 갈 수 있었지만 오후가 되면서 바람이 어제처럼 거세지고 있었고, 저 아래 글자 바위에 난 크랙이 우리 마음을 당기는 듯 싶었다.

해는 서산에 지고 사진 빨은 이미 기대하기 어려운 시간에 글자바위에 도착했다. 목숨 수(壽)자를 중국인들이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해서 이 바위에 여러 개를 거대한 크기로 새겨놓았다는 말에, 왠지 그 곳을 막상 올라가려고 하니 목숨이라는 뜻 때문에 떨떠름한 느낌이 들었다. 크랙이 글자사이로 나있어, 만약 신에 저주가 기다린다면 글자는 발로 밟지 않고 오르면 되지 않겠느냐 라는 어릴 적 땅따먹기 놀이 식 논리로 등반에 임했다.

요세미티에서 느껴본 5.10 크랙에 대한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손에 테이프를 잔득 감아 돌리고 등반을 시작했다. 손과 발을 크랙속에 잘 째밍하며 한 동작씩 움직여 나갔지만, 어찌 째밍이 그렇게 쉽기만 하겠는가, 발끝에 통증이 심해지는 곳에서 손째밍도 불안해졌을 때에 발 밑에 목숨 수 자 어느 획이 계단만큼이나 큰, 발판이 보여 몹시 망서려 졌다.

밟을 것이냐 말 것이냐 신의 저주가 기다린다해도 그건 나중이고, 지금 당장 떨어지기는 싫었다. 망설임 속에 어쩔 수 없이 목숨 수 자를 발로 밟았고, 빠르게 손 째밍을 다시 한 후, 빠르게 목숨 수 자에서 발을 땠다. 그 후 등반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목숨 수 자를 발로 밟지도, 손으로 만지지도 않았다.

내가 잘 한 걸까? 3년 고개 이야기처럼 장수하고 푼 욕심에 계속 글자를 밟고 등반했다면 난이도가 5.6은 되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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