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양정--은벽 합동 닐기리 중앙봉 원정대 (김기혁,심상돈,임병길 회원 참가)

by 김근생 posted May 12, 200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양정산악회 닐기리 중앙봉원정대

마칼루팀과 같은 시즌에 닐기리 중앙봉에 도전한 양정-은벽산악회합동대는 5명의 대원에 2명의 셀파를 합쳐 도합 7명이 한꺼번에 정상을 등정해 81년 가을 성대팀이 세운 4명의 기록을 갱신했다.

닐기리 중앙봉(6,940m) 원정은 이해 1월에 동계 에베레스트 정찰을 마친 양정산악회의 김기혁(28), 심상돈(28), 임병길(27)대원이 현지에서 입산허가를 받아 급조되었다.

정찰을 끝내고 자금 조달이 어려웠던 이들은 마침 안나푸르나 정찰차 네팔에 온 은벽산악회팀에게 합동원정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은벽산악회에서 안창열(32), 김현수(27), 김광(27), 김영자대원(여·29)이 합류하자 총대원은 7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고정로프와 연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캠프 전진을 강행해 등반 개시 9일 만인 4월 22일에는 3캠프(6,150m)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4월 25일 새벽 4시 30분 김기혁대장과 심상돈, 임병길, 김현수, 최광희대원과 2명의 셀파 등 7명이 동시에 정상공격에 나섰다. 40미터 로프 1동으로 안자일렌을 한 일행은 오후 1시부터 불어닥친 눈보라를 뚫고 드디어 전원이 정상에 올라섰다.

그러나 이들은 하산 도중 김광 대원이 실족해 발목 골절상을 입자 그를 후송하느라 자정 넘어서야 마지막 캠프로 돌아왔다. 다음날 원기를 찾은 대원들은 계속 하산했으나 심상돈대원은 최대원을 간호하기 위해 제3캠프에 남았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날씨가 악화되어 그를 후송하지 못하고 10일간을 버틴 끝에 극적으로 생환했다.


산(山)사나이의 우정
--------------------------------------------------------------------------------


1982년 4월 히말라야의 닐기리 중앙봉 정사에 태극기를 꽂은 한국 등반대는 장비 부족과 대원 한 명의 부상으로 하산을 할 수가 없었다. 고심끝에 안창렬 대장은 산 정상의 1/3 지점인 제3캠프에 부상당한 김 광 대원과 그를 돌봐 줄 심상돈 씨를 남겨 놓고 하산했다. 그 다음날 다시 올라와서 이들을 데려간다는 약속을 남겨둔채.

그러나 다음날 베이스캠프로 내려간 등반대는 심상돈 씨에게 "직접 나서서 구조할 만큼 체력을 회복한 사람이 없음"이라는 무선 회신과 구조 헬기가 뜰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왔다. 두 사람은 체력을 아끼기 위해 꽁꽁 얼어붙은 텐트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이틀을 보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이들은 환청과 환각에 시달렸다.

고립 6일째, 헬기가 도착했으나 워낙 지대가 높고 산소가 부족한 지역이라 착륙도, 로프 구조도 불가능하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

고립 8일째, 심상돈 씨는 벌떡 일어났다. 직접 산을 내려가기로 결심한 그는 비닐로 썰매를 만들어 김 광 씨를 앉히고 끌면서 걸어 내려갔다. 그러나 심상돈 씨 앞에는 건널 수 없는 크레바스 지대가 나타났다. 눈 앞이 캄캄했다. 부상자 썰매는 고사하고 혼자 내려갈 수도 없는 길이었다.

하룻밤을 지낸 그가 길을 찾고 있는데 마침 구조하러 올라오던 네팔인 구조대를 기적적으로 만났다. 구조대는 심상돈 씨에게 밧줄을 던졌다. 녹아 벌어진 크레바스 사이를 밧줄로 잡고 건너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심상돈 씨는 밧줄을 잡지 않았다.

그가 구조되어 건너가면 부상당한 동료를 그냥둔 채 내려가자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히말라야 등반에서는 '모두 죽느니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누구도 비정하게 생각하지 않는 철칙이나 마찬가지였다. 구조대는 소리쳤다. 그러나 심상돈 씨는 끝까지 밧줄을 잡지 않았다. 결국 네팔인들이 조심스럽게 산을 올라왔고, 천신만고 끝에 두 사람은 모두 구조되었다.

--------------------------------------------------------------------------------
*** 이 글은 삼양사 96년 사보에 나왔던 글입니다.


Articles

1 2 3 4 5 6 7